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략 폭격/2차 대전 (문단 편집) ===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 === 1942년 중순에 영국에 배치된 [[미합중국 유럽전략공군#s-3.1|제8공군]]으로 대표되는 미 육군 항공대는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정도였다. 즉, 민간 지역 및 산업 시설을 폭격할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던 셈. 이러한 미군을 본격적으로 전략 폭격에 밀어 넣은 조약이 바로 카사블랑카 훈령(Casablanca Conference)이었고, 이 조약에 체결된 이후 미 육군 항공대 또한 본격적으로 독일 본토 전략 폭격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미군의 경우 [[B-17]]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군의 [[아브로 랭커스터|랭커스터]]보다는 폭장량이 떨어졌지만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도배[* 반면 영국 공군의 [[아브로 랭커스터]]는 7.7mm가 방어기총이였다. 이 무장은 당시만 해도 항공기용 무장으로써 실효성이 의심되는 정도였다. 다만 랭커스터는 B-17보다 폭장량이 2배정도 높았다.]가 되어 있었기에 포탑 화력이 더 뛰어났고 장갑판도 여러 군데 떡칠이 되어 있었기에 방어력이 더 우수했다. 덕분에 미군의 경우 밀집 편대를 이루어 주간 폭격을 실행하게 된다. 게다가 미군의 주장으로는 노던 조준기가 장착되어 있어 더 정밀한 폭격이 가능하다는 것도 있었다. 이 당시 미군은 '정밀 폭격(Precision bomb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현재 와서는 [[의도는 좋았다|의도는 좋았지만]] 의도를 이룰 수 있는 기술력이 없었기에 융단 폭격이나 다를 바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노던 조준기의 정확도가 그 당시 주장만큼 나오지 않았기도 했고,[*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훈련된 조작원이 사용한다는 가정 하에 [[원형 공산 오차|CEP]] 30m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본토 위에는 엄청난 제트 기류가 불어서 고공 폭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저공에서조차 CEP가 500m로 벌어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도쿄 대공습|그래서...]]] 카사블랑카 조약 후에는 영국과 동일하게 민간 지역을 융단 폭격하기 시작했기 때문. 물론 [[H2X 레이더]]등을 도입해 정확도를 높이려 하기는 했지만 기술 수준이 수준이라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정확도 자체는 떨어졌지만, 엄청난 물량이 있었으므로, 양으로 커버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즉, 한 발 한 발의 정확도 자체는 시망이었지만 워낙 많이 떨구다 보니 전략적인 효과는 충분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동부 전선의 전력을 서부로 돌릴 정도였으니 구라빨이었을지언정 제 역할은 한 셈이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폭격의 경우 이 때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단 한 번의 폭격으로 50,000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내고 실질적으로 도시 전체가 궤멸되는 상황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43년 중반부에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 공군 에이스들이 요격을 나오게 되었고 [[B-17]] 공략법이 점차 개발됨에 따라 슈바인푸르트 폭격 같은 참사를 맞이하게 된다. 강력한 방어 화력과 밀집 대형만 믿고 주간에 몰려갔다가 개털려버린 것. 이 때문에 43년 후반기에 [[P-51 머스탱]]이 본격적으로 [[호위 전투기]]로써 등장하기 전까지 소강 상태에 빠진다. 즉, 폭격기 무적론이 결국엔 밑천 드러나버린 셈. 이렇게 독일군 [[요격기]]들에 의한 피해가 심각해지자 일단 [[P-51]]이 [[호위기]]로 가세한 후 독일 공군을 사냥하는 낚시 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이를 대주간(The Big Week)이라 불리는데, 44년 2월 20일부터 25일 까지 수행했던 대규모 폭격 레이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폭격기 편대로 독일군의 어그로를 끌어 풀링해 들어오면 [[P-51]]이 뎀딜을 한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 덕분에 [[독일 공군]]은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보게 되었고[* 물론 그 와중에도 동부 전선에서 지속적으로 소모전이 벌어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후 독일은 영공을 연합군에게 무료 임대를 주게 된다. 특히 이 당시 인적 손실은 독일 공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써 더 이상 숙련된 조종사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이후 독일 공군은 초짜들이 요격하러 올라왔다가 스펙부터 우월[* 1943년 7월 생산한 Bf109G-6만 해당되는 이야기, 1943년 10월 부터는 독일군도 DB605A 엔진의 한계를 느껴 MW50을 사용 가능한 DB605AM 장착형 G-6를 생산하고 44년 4월부터는 슈퍼차저의 크기를 확장하고 MW50을 장착한 DB605ASM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고 실력도 더 좋은 [[P-51|P-51]]들한테 킬수만 바치는 꼴이 되어버렸고, [[아르덴 대공세]] 시점에 이르러서 독일 지상군들은 하늘에 떠 있는 건 다 적군이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이렇게 독일 본토 폭격이 지속되다 1944년 5월부터 프랑스 연안 지역에 다시 [[인외마경]]이 벌어진다.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전초전 성격의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윈스턴 처칠]]과 [[아서 해리스]] 등을 비롯한 영국측 인사들은 반대를 표명했으나 결국 독일 공군은 애초에 제공권을 잃었기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근거로 [[아이젠하워]]에게 설득되었고,[* 몽고메리와 패튼을 데리고 다녔던 게 이해가 된다.] 독일 영토 폭격은 잠시 중단되며 미, 영 공군의 주 목표는 상륙군의 전술 폭격으로 변경된다. 어쨌든 미국과 영국의 시도 때도 없는 폭격(미국은 낮에, 영국은 밤에)으로 인해 독일은 밤낮 없이 불타올랐고 점차 산업 기반을 잃어버릴 지경까지 가게 되며, 동시에 동부 전선에서도 삽질을 반복하고 [[막장]]이 되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